부도. 기업인에게는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다. 최 회장에게도 그랬다. 하지만 성공한 기업인과 실패한 기업인을 가름할 수 있는 기준은 다음 수순, 즉 위기관리 능력이다. 최 회장은 상심했으나 체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크라운바지가 안 팔려서 실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자포자기했을 겁니다. 저는 당시 노숙자들을 보면서 꼭 재기해야겠다는 다부진 생각이 있었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페인트 통을 메고 오르막길을 오르며 고생도 많이 해봤고 아마추어권투 같은 격한 운동도 많이 했었어요. 그때 저는 ‘참자, 참자’란 생각으로 버텨냈거든요.”
며칠 만에 최 회장은 집을 나섰다. 그것도 동대문시장으로 말이다. ‘지금부터 시작이다’란 생각을 하며 동대문시장 입성할 때처럼 초심으로 돌아가 곳곳을 찾아다니며 유행을 읽었다.
“그때 지인을 통해 ‘시흥에서 시작한 비버리힐스폴로클럽이 잘 된다’란 소문을 들었어요. 그리고 실제로 신평화시장 3층에 나와 있는 걸 가봤더니 사람들이 사가기 시작하는데 정말 장사가 잘되는 거예요. 그게 남자 옷이었어요. 그래서 내가 여성복을 하면 되겠다 싶었지요. 라이선스를 받아오려고 알아봤더니 3000만원이라 그러더라고요. 그때 홀어머니가 아파트 33평짜리를 갖고 계셨는데 그걸 담보로 2000만원, 갖고 있던 자동차 팔아서 1000만원, 아내가 든 적금 1000만원 정도를 모두 헐어서 새로 사업에 뛰어들었어요.”
이때가 94년이었다.
“이제 진짜 사업을 제대로 한번 해보자고 해서 우선 사명부터 지어야겠다 싶었어요. 당시 비록 남의 가게 한쪽에 다시 자리를 마련해 형편은 볼품없었지만 ‘불같이 사업이 일어나라’란 뜻을 떠올렸지요. 불 화(火)자가 세 개나 들어간 등불 형(熒)자에 터 지(址)자를 쓴 ‘형지’는 이렇게 탄생한 겁니다.”
당시 ‘형지물산’ 오늘날 ‘패션그룹형지’는 이런 연유로 탄생됐던 것이다. 형지물산의 사무실은 남평화시장에 있는 1평짜리 가게였다. 12년 전 광장시장 시절처럼 초라했지만 초심으로 돌아가 새벽부터 밤까지 다시 이를 악물고 뛰었다. 하지만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무리하게 라이선스 비용을 내고나니 매장 얻을 돈이 없었던 것. 그래서 처음 1년은 무리하지 않고 상품 개발에만 몰두했다.
당시 겨울옷은 검은색, 혹은 회색 위주였던 점에 주목했던 최 회장은 스웨터를 만들되 밝고 여성스럽게 만들면 승산이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페인트업체 시절 때부터 익힌 색채감각을 되살려 당시 ‘램스울’이라는 비교적 새로운 소재의 스웨터를 생산했는데 색깔이 최 회장이 원하는 그대로였다. 당시 최 회장은 매장 얻을 곳이 없자 백화점 매대를 임차해 상품을 내놨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차별화된 색감에 품질, 가격까지 괜찮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내놓자마자 주부들이 다 사가 버렸다. 행복도 잠시. 미국 본사와 국내 판매권 소유사 간의 계약이 2년 만에 종료되는 바람에 최 회장의 재기스토리는 여기서 막을 내리는 듯했다.
“아쉬웠지만 많은 걸 얻었어요. 브랜드 사업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고 더불어 종잣돈까지 마련할 수 있었으니까요.”
‘후속타’는 계속 고민거리였다. 브랜드 사업에서 희망을 본 만큼 이 사업을 하긴 해야겠는데 마땅한 게 눈에 잘 안 들어왔다.
“그래서 더 선택에 고민이 컸어요. 그때 크로커다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남성복이 6개월 먼저 들어와서 팔리고 있었는데 히트를 치기 시작하더라고요. ‘저거다’ 싶어 라이선스 업자를 찾았지만 6개월이 걸리더군요. 여성복 하겠다고 나서면 남성복 업자가 그것마저 선점할까 싶어 조용히 작업하다보니 그렇게 된 겁니다. 기어이 업자를 만나 싱가포르 본사에서도 의욕적으로 전개하지 않던 여성복 라이선스를 따낼 수 있었습니다.”
96년, 마침내 국민브랜드 여성크로커다일(Crocodile Ladies)의 서막이 오르는 순간이다. 초창기 여성크로커다일은 디자인팀, 영업팀 외 관리팀 등 최소한의 전담 인력을 꾸리고 20여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사업부를 결성했다. 마케팅에서 말하는 4P 전략으로 보면 장소(Place)와 가격(Price)은 방향을 세웠는데, 문제는 상품(Product)과 판촉(Promotion)이었다.
“동대문 상인 시절 다른 업체들이 영캐주얼에 집중할 때 저는 사이즈가 필요 없는 고무줄 바지를 만들어서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3040 여성들의 남다른 요구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이처럼 수요는 분명한데, 브랜드를 달았다면 어떤 상품을 만들어야 할까란 고민이 생겼어요. 결혼과 출산으로 살림과 육아가 생활의 대부분인 주부들은 팔뚝살과 뱃살 등이 고민에다 미혼시절 입던 옷을 못 입는 건 당연지사 아닙니까. 때문에 새 옷을 사야 하는데 값도 비싸고 사이즈도 안 맞고 시장 옷을 입자니 품질과 A/S가 미덥지 않지요. ‘품질도 좋고 가격도 싼 옷’이 답이더군요. 그래서 ‘대한민국 모든 여성들의 옷에 대한 스트레스를 없애주겠다’는 신념으로 실제 주부를 피팅 모델로 써서 제품개발에 나섰어요”
그의 첫 아이템은 역시 바지였다. ‘크라운바지’ 시절부터 노하우가 있었기 때문. 그는 실제 주부 피팅 모델로 정확한 사이즈를 만들었다. 그 결과, 일반 여성복(정장) 브랜드의 55사이즈보다는 크고 66사이즈보다는 작은 중간 정도의 사이즈, 즉 3040여성들의 현실적 체형에 맞는 사이즈 체계가 나왔다. 여기에다 당시 골프웨어에 주로 쓰이던 핫핑크, 연두, 바이올렛 같은 화사한 계열의 색을 여성복 최초로 도입하고 화려한 프린트 등의 디자인을 내놨다.
다음은 판로였다.
“매장 오픈은 지방의 재래시장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최 회장의 말을 듣고 직원들은 강하게 반대했다. 브랜드가 소위 뜨기 위해서는 우선 서울의 중심상권에 근사한 매장을 갖추는 것이 정석으로 통했기 때문. 최 회장의 발상은 이런 상식을 한 번에 뒤집은 것이었다.
“싱가포르 본사에서도 우려했지만 솔직히 당시 크로커다일은 영업력도 브랜드력도 약했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현실적인 판단을 한 겁니다. 수원, 인천, 수도권을 공략한 뒤 서울 중심가로 들어가자는 전략 아래 주부들이 잘 다니는 곳을 집중적으로 알아봤지요. 판매방식도 판매 위탁형태의 대리점 체제로 가져가서 점주와 회사 모두 ‘윈윈’ 하도록 설계했습니다.”
여성크로커다일이 경기도 시흥 외곽에 1호점을 낸 사연이다. 이런 전략은 주효했다. 우선 제품이 먹혔다. 그가 내놓은 여성크로커다일 바지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대리점 매출이 오르자 전국에 ‘여성크로커다일 대리점을 하면 돈방석에 앉는다’는 소문이 퍼졌다. 자연히 대리점 오픈에 대한 문의가 폭주하고 전국 팔도 안 가는 곳 없이 방방곡곡 ‘돈 버는 악어(여성크로커다일)’가 한 마리씩 들어앉았다는 말이 돌았다.
최 회장은 사업 확장을 염두에 두고 98년 형지어패럴로 사명을 바꾸고 법인을 설립했다. 유통망이 100여개로 늘어난 2002년, 브랜드에 대한 혼돈을 막고 보다 확실하게 시장에 안착하고자 추가로 2가지 전략을 썼다. 첫째, 당시까지 ‘Crocodile Ladies’라는 영문명으로 만들어 붙였던 매장의 간판을 모두 ‘크로커다일’이라고 읽기 쉬운 한글로 바꾸어 표기했다. 그 뒤 당시로선 획기적으로 배종옥, 오연수에 이어 송윤아 등 스타급 모델을 기용해 TV-CF와 잡지광고, 신문광고 등 공격적인 브랜드 알리기에 나섰다. ‘유명 여배우가 입는 브랜드’로 소비자들의 사이에 인식이 높아지자 초창기 ‘여성크로커다일’은 수입 브랜드 ‘라코스테’의 ‘가짜 브랜드’라는 오명은 한순간 사라졌다.
그 후 매장 수가 2002년 100개, 2003년 180개, 2004년에는 260개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여성크로커다일은 단일브랜드 최초로 300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려 국내 패션 역사의 새로운 성공신화를 썼던 것이다.
■ 마케팅 4P 성공전략 입증해낸 여성크로커다일
“보통 사람 같으면 자포자기했을 겁니다. 저는 당시 노숙자들을 보면서 꼭 재기해야겠다는 다부진 생각이 있었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페인트 통을 메고 오르막길을 오르며 고생도 많이 해봤고 아마추어권투 같은 격한 운동도 많이 했었어요. 그때 저는 ‘참자, 참자’란 생각으로 버텨냈거든요.”
며칠 만에 최 회장은 집을 나섰다. 그것도 동대문시장으로 말이다. ‘지금부터 시작이다’란 생각을 하며 동대문시장 입성할 때처럼 초심으로 돌아가 곳곳을 찾아다니며 유행을 읽었다.
“그때 지인을 통해 ‘시흥에서 시작한 비버리힐스폴로클럽이 잘 된다’란 소문을 들었어요. 그리고 실제로 신평화시장 3층에 나와 있는 걸 가봤더니 사람들이 사가기 시작하는데 정말 장사가 잘되는 거예요. 그게 남자 옷이었어요. 그래서 내가 여성복을 하면 되겠다 싶었지요. 라이선스를 받아오려고 알아봤더니 3000만원이라 그러더라고요. 그때 홀어머니가 아파트 33평짜리를 갖고 계셨는데 그걸 담보로 2000만원, 갖고 있던 자동차 팔아서 1000만원, 아내가 든 적금 1000만원 정도를 모두 헐어서 새로 사업에 뛰어들었어요.”
이때가 94년이었다.
“이제 진짜 사업을 제대로 한번 해보자고 해서 우선 사명부터 지어야겠다 싶었어요. 당시 비록 남의 가게 한쪽에 다시 자리를 마련해 형편은 볼품없었지만 ‘불같이 사업이 일어나라’란 뜻을 떠올렸지요. 불 화(火)자가 세 개나 들어간 등불 형(熒)자에 터 지(址)자를 쓴 ‘형지’는 이렇게 탄생한 겁니다.”
당시 ‘형지물산’ 오늘날 ‘패션그룹형지’는 이런 연유로 탄생됐던 것이다. 형지물산의 사무실은 남평화시장에 있는 1평짜리 가게였다. 12년 전 광장시장 시절처럼 초라했지만 초심으로 돌아가 새벽부터 밤까지 다시 이를 악물고 뛰었다. 하지만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무리하게 라이선스 비용을 내고나니 매장 얻을 돈이 없었던 것. 그래서 처음 1년은 무리하지 않고 상품 개발에만 몰두했다.
당시 겨울옷은 검은색, 혹은 회색 위주였던 점에 주목했던 최 회장은 스웨터를 만들되 밝고 여성스럽게 만들면 승산이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페인트업체 시절 때부터 익힌 색채감각을 되살려 당시 ‘램스울’이라는 비교적 새로운 소재의 스웨터를 생산했는데 색깔이 최 회장이 원하는 그대로였다. 당시 최 회장은 매장 얻을 곳이 없자 백화점 매대를 임차해 상품을 내놨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차별화된 색감에 품질, 가격까지 괜찮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내놓자마자 주부들이 다 사가 버렸다. 행복도 잠시. 미국 본사와 국내 판매권 소유사 간의 계약이 2년 만에 종료되는 바람에 최 회장의 재기스토리는 여기서 막을 내리는 듯했다.
“아쉬웠지만 많은 걸 얻었어요. 브랜드 사업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고 더불어 종잣돈까지 마련할 수 있었으니까요.”
‘후속타’는 계속 고민거리였다. 브랜드 사업에서 희망을 본 만큼 이 사업을 하긴 해야겠는데 마땅한 게 눈에 잘 안 들어왔다.
“그래서 더 선택에 고민이 컸어요. 그때 크로커다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남성복이 6개월 먼저 들어와서 팔리고 있었는데 히트를 치기 시작하더라고요. ‘저거다’ 싶어 라이선스 업자를 찾았지만 6개월이 걸리더군요. 여성복 하겠다고 나서면 남성복 업자가 그것마저 선점할까 싶어 조용히 작업하다보니 그렇게 된 겁니다. 기어이 업자를 만나 싱가포르 본사에서도 의욕적으로 전개하지 않던 여성복 라이선스를 따낼 수 있었습니다.”
96년, 마침내 국민브랜드 여성크로커다일(Crocodile Ladies)의 서막이 오르는 순간이다. 초창기 여성크로커다일은 디자인팀, 영업팀 외 관리팀 등 최소한의 전담 인력을 꾸리고 20여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사업부를 결성했다. 마케팅에서 말하는 4P 전략으로 보면 장소(Place)와 가격(Price)은 방향을 세웠는데, 문제는 상품(Product)과 판촉(Promotion)이었다.
“동대문 상인 시절 다른 업체들이 영캐주얼에 집중할 때 저는 사이즈가 필요 없는 고무줄 바지를 만들어서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3040 여성들의 남다른 요구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이처럼 수요는 분명한데, 브랜드를 달았다면 어떤 상품을 만들어야 할까란 고민이 생겼어요. 결혼과 출산으로 살림과 육아가 생활의 대부분인 주부들은 팔뚝살과 뱃살 등이 고민에다 미혼시절 입던 옷을 못 입는 건 당연지사 아닙니까. 때문에 새 옷을 사야 하는데 값도 비싸고 사이즈도 안 맞고 시장 옷을 입자니 품질과 A/S가 미덥지 않지요. ‘품질도 좋고 가격도 싼 옷’이 답이더군요. 그래서 ‘대한민국 모든 여성들의 옷에 대한 스트레스를 없애주겠다’는 신념으로 실제 주부를 피팅 모델로 써서 제품개발에 나섰어요”
그의 첫 아이템은 역시 바지였다. ‘크라운바지’ 시절부터 노하우가 있었기 때문. 그는 실제 주부 피팅 모델로 정확한 사이즈를 만들었다. 그 결과, 일반 여성복(정장) 브랜드의 55사이즈보다는 크고 66사이즈보다는 작은 중간 정도의 사이즈, 즉 3040여성들의 현실적 체형에 맞는 사이즈 체계가 나왔다. 여기에다 당시 골프웨어에 주로 쓰이던 핫핑크, 연두, 바이올렛 같은 화사한 계열의 색을 여성복 최초로 도입하고 화려한 프린트 등의 디자인을 내놨다.
다음은 판로였다.
“매장 오픈은 지방의 재래시장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최 회장의 말을 듣고 직원들은 강하게 반대했다. 브랜드가 소위 뜨기 위해서는 우선 서울의 중심상권에 근사한 매장을 갖추는 것이 정석으로 통했기 때문. 최 회장의 발상은 이런 상식을 한 번에 뒤집은 것이었다.
“싱가포르 본사에서도 우려했지만 솔직히 당시 크로커다일은 영업력도 브랜드력도 약했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현실적인 판단을 한 겁니다. 수원, 인천, 수도권을 공략한 뒤 서울 중심가로 들어가자는 전략 아래 주부들이 잘 다니는 곳을 집중적으로 알아봤지요. 판매방식도 판매 위탁형태의 대리점 체제로 가져가서 점주와 회사 모두 ‘윈윈’ 하도록 설계했습니다.”
여성크로커다일이 경기도 시흥 외곽에 1호점을 낸 사연이다. 이런 전략은 주효했다. 우선 제품이 먹혔다. 그가 내놓은 여성크로커다일 바지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대리점 매출이 오르자 전국에 ‘여성크로커다일 대리점을 하면 돈방석에 앉는다’는 소문이 퍼졌다. 자연히 대리점 오픈에 대한 문의가 폭주하고 전국 팔도 안 가는 곳 없이 방방곡곡 ‘돈 버는 악어(여성크로커다일)’가 한 마리씩 들어앉았다는 말이 돌았다.
최 회장은 사업 확장을 염두에 두고 98년 형지어패럴로 사명을 바꾸고 법인을 설립했다. 유통망이 100여개로 늘어난 2002년, 브랜드에 대한 혼돈을 막고 보다 확실하게 시장에 안착하고자 추가로 2가지 전략을 썼다. 첫째, 당시까지 ‘Crocodile Ladies’라는 영문명으로 만들어 붙였던 매장의 간판을 모두 ‘크로커다일’이라고 읽기 쉬운 한글로 바꾸어 표기했다. 그 뒤 당시로선 획기적으로 배종옥, 오연수에 이어 송윤아 등 스타급 모델을 기용해 TV-CF와 잡지광고, 신문광고 등 공격적인 브랜드 알리기에 나섰다. ‘유명 여배우가 입는 브랜드’로 소비자들의 사이에 인식이 높아지자 초창기 ‘여성크로커다일’은 수입 브랜드 ‘라코스테’의 ‘가짜 브랜드’라는 오명은 한순간 사라졌다.
그 후 매장 수가 2002년 100개, 2003년 180개, 2004년에는 260개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여성크로커다일은 단일브랜드 최초로 300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려 국내 패션 역사의 새로운 성공신화를 썼던 것이다.
■ 마케팅 4P 성공전략 입증해낸 여성크로커다일

① 제품관리(Product management)
제품이란 고객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시장에 제공되는 것은 모두 해당한다. 여성크로커다일은 3040 여성들의 신체 사이즈를 실제로 측정해 종전 사이즈 체계와는 다른 틈새 사이즈를 제시했다. 더불어 색깔도 핑크, 바이올렛 등 당시 고급 골프웨어에 쓰이던 원색 계열을 과감히 적용, 소비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② 가격관리(Price management)
‘대한민국 모든 여성들의 옷에 대한 스트레스를 없애주겠다’는 최 회장의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품질은 고급, 가격은 중저가로 설정해 여성, 특히 주부고객들의 환심을 샀다.
③ 경로관리(Place management)
종전 업체들이 장악하고 있는 도심 A급 상권을 피하고 철저히 주부고객들이 자주 이용하는 수도권 B급 상권을 공략해 서서히 핵심 상권으로 옮아가는 전략으로 성공.
④ 촉진관리(Promotion management)
2002년부터 당시로선 획기적으로 배종옥, 오연수에 이어 송윤아 등 스타급 모델을 기용해 TV-CF와 잡지광고, 신문광고 등 공격적인 브랜드 알리기에 나서 초창기 ‘여성크로커다일’은 수입 브랜드 ‘라코스테’의 ‘가짜 브랜드’라는 오명을 불식.
제품이란 고객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시장에 제공되는 것은 모두 해당한다. 여성크로커다일은 3040 여성들의 신체 사이즈를 실제로 측정해 종전 사이즈 체계와는 다른 틈새 사이즈를 제시했다. 더불어 색깔도 핑크, 바이올렛 등 당시 고급 골프웨어에 쓰이던 원색 계열을 과감히 적용, 소비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② 가격관리(Price management)
‘대한민국 모든 여성들의 옷에 대한 스트레스를 없애주겠다’는 최 회장의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품질은 고급, 가격은 중저가로 설정해 여성, 특히 주부고객들의 환심을 샀다.
③ 경로관리(Place management)
종전 업체들이 장악하고 있는 도심 A급 상권을 피하고 철저히 주부고객들이 자주 이용하는 수도권 B급 상권을 공략해 서서히 핵심 상권으로 옮아가는 전략으로 성공.
④ 촉진관리(Promotion management)
2002년부터 당시로선 획기적으로 배종옥, 오연수에 이어 송윤아 등 스타급 모델을 기용해 TV-CF와 잡지광고, 신문광고 등 공격적인 브랜드 알리기에 나서 초창기 ‘여성크로커다일’은 수입 브랜드 ‘라코스테’의 ‘가짜 브랜드’라는 오명을 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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